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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이카 복기 1. 과장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
    코이카 2022. 4. 9. 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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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장에게 보내는 편지1.pdf
    0.04MB

    안녕하세요 과장님.

     

    ○○○○○입니다.

     

    사무실 이사 등으로 여러모로 바쁘실 와중에 메일을 보내게 되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어제 OJT 결과를 이야기하며 여러 가지 생각이 들던 차에 면담을 신청하기 전 제 생각을 명확히 밝혀야 할 필요가 있을 듯 하여 우선 메일을 적습니다.

     

    우선 어제 말씀드린 OJT 내용과 제가 보내드린 보고서를 종합하여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5번 학교에서 (아마도 대다수의 키르기즈 공립 학교에서) 한국어 정규 수업은 불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제는 경황이 없던 와중이라 일하는 시간이 부족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드렸으나,

    정작 중요한 것은 일의 시간보다는 그 일이 정식 업무인지 아닌지에 달린 것 같습니다.

     

    대다수의 봉사단원이 많은 시간을 할애 받지 못하는 것은 여러 가지 사정 상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학교라는 기관의 특성 상 각국 교육체계, 개별 학교의 교육목표 달성이 우선시 될 것임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작은 부분이라도 정식 업무를 부여받는 경우와 일종의 과외활동을 부여받는 경우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어 수업을 예로 들어 하루 두 시간이라도 정규 수업이 배정된다면, 그 수업의 성패여부를 떠나서 그 수업은 지속될 수 있습니다.

    그 외 나머지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는지는 단원의 자유이자 능력이 될 것이고,

    그 정규 수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능력을 기르는 데 최선을 다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방과 후 수업은 같은 두 시간이 배정될지라도 애초에 업무 자체의 강제성과 지속성이 떨어집니다.

    그 외의 시간을 잘 활용할지라도 본 업무가 안정적으로 궤도에 올라야 나머지 활동에도 의미가 생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나마도 5번 학교의 경우 방과 후 수업조차 아직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며,

    와서 직접 교장선생님과 이야기 나눠보신 바와 같이 당장 한국어 교사가 필요하지 않은 상황이라고까지 볼 수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두 시간 수업하는 건 같은 것 아니냐고 하실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파견되는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업무의 지속성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작정 덜려들기엔 너무 큰 부담이 따릅니다.

     

    애초에 키르기즈스탄 5번 학교를 1지망이 아니라도 고려했던 부분도,

    학교라면 기존에 제가 가지고 있던 전문성을 나름 살리면서 안정적으로 봉사활동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많아도, 적어도 괜찮습니다. 나머지 시간에 대한 책임은 제가 최대한 노력해서 의미 있게 만들어 보겠습니다.

    부디 과외 업무가 아닌 정식 업무로 일할 수 있는 기관을 찾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름은 큰 각오를 하고 온 봉사활동이니만큼 제가 작으나마 제 능력을 최대한으로 보탤 수 있는 환경을 찾아주시길 다시 한 번 부탁드립니다.

    바쁘신 와중이겠지만 한 번 알아봐 주시고, 필요하시다면 시간이 허락되는 범위에서 면담을 한 번 했으면 좋겠습니다.

     

    어려운 부탁을 드리게 되어 죄송합니다.

     

    ○○○ 올림.

     

    ===========================================================================

     

    키르기스스탄에서 쓰던 한국어 교육자료를 정리해서 올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코이카에 있던 시절이 떠올랐다. 당시 생각보다 기록을 철저하게 해두었던 덕분에 파일을 하나하나 열어보며 기억을 곱씹을 수 있었다. 그래서 기록을 중심으로 싹 한번 까보면서 복기를 해보려고 한다.

     

    코이카에서 국내 교육을 마치며 배정된 봉사 장소에 대한 내용은 '키르기스스탄, 공립학교, 한국어교사'였다. 사실 이 때 의심했어야 한다. 아니 세상 어느 천지의 공립학교에서 외국인 봉사단원을 받아 유명하지도 않은 번외의 외국어를 가르치고 배운단 말인가. 이 때까지만 해도 코이카에 대한 믿음이 남아있던 시기라 당연히 학교에 한국어 교육을 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베트남 등의 한국어 교육 수요가 많은 나라에서는 대학교로 배치받기도 하고, 수업도 많이 하니까.

     

    그러나 현실은 개같이 멸망. OJT에는 과장도 따라갔는데, 5번 학교에서 교장이 만나자마자 하는 소리는 '왜 왔냐, 한국어 교사 필요 없다, 컴퓨터 가르쳐라'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좀 웃기기도 한데, 당연히 교장 입장에서야 한국어 나부랭이를 하느니 컴퓨터실 지어줄 컴퓨터 교사가 더 중요할테지. 그 때는 정말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키르기스스탄이라는 생전 듣도보도 못한 나라의 수도에서 6시간 떨어진 시골로 와서 듣는 소리가 내 자리에 대한 부정이라면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

     

    그리고 OJT가 진행되었다. 근데 말이 OJT지 그냥 맨땅에 헤딩하기지 뭔 OJT같은 거창한 이름이란 말인가. 한국어 수업이 없고, 지역엔 부동산 중개인이 없고, 말은 통하지도 않는 와중에 도와주기로 한 선생놈은 늘 어디론가 사라지기 일쑤고. 심지어 홈스테이 집엔 욕조도, 수세식 화장실도 없어서 여름 일주일을 눈치보며 머리 감고, 방에서 물티슈로 몸을 닦으며 살았다. 그리고 희망을 가졌다. 왜? 과장이 직접 그 말도 안되는 소리를 보고 갔으니까. 그리고 본인이 본인 입으로 궁시렁대며 다른 기관으로 옮길 수도 있겠다고 했으니까. 물론 그 희망은 그냥 어리석은 망상에 지나지 않았지만.

     

    위의 편지는 탈라스 5번학교로의 OJT 이후 과장에게 보낸 편지이다. 다시 읽어봐도 내가 틀린 말을 했거나 억지를 부리지는 않은 것 같다. 내가 차라리 토목이나 다른 종류의 봉사를 했더라면 그냥 맨땅에서 뭔가를 해보기는 했을 것이다. 근데 한국어 교사로 간거 아니냐고. 그리고 한국어 교육 할 수 있대서 나 뽑은거 아니냐고. 일이 없대서 내가 좀 더 잘 할 수 있는, 일 있는 자리로 보내달라는게 그렇게 무리였을까? 하기사 애초에 생각도 없었을테니 당연히 무리였겠지.

     

    결국 메일에 대한 답신은 '에이, 해보긴 했냐, 그래도 시도는 해보고 얘기해라'였다. 원론적이지만 참 하나마나한 헛소리였다. 최소한 기관을 찾는 척이라도 했어야지 이 양반들아. 내가 놀자고 기관을 옮겨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 잘난 수도 단원들처럼 일주일에 수업 3개 깔고 잘난척 뻐기는 것도 아니었고, 일 좀 열심히 하겠다고 일 할만한 곳으로 보내달라는 것이 그렇게도 어려웠을까?

     

    그래서 쓰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냥 오갔던 기록을 보며 한풀이라도 좀 해야 내 마음 속에서 털고 갈 수 있을 것 같다. 이전에 그알에서 해외봉사 관련 제보 받길래 다 제보까지 한 내용이다. 물론 어쩐 일인지 이후에 방송이 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 당시 썼던 보고서까지 탈탈 털어 까발리면 좀 제대로 마무리하고 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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