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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66, 집밥의 위대함, 무기력증, 카라멜라이즈
    코이카 2015. 6. 22. 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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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존감이 무기력증에 빠진 날들이다. 다행이 집은 구했고, 내일 이사를 하지만 그마저도 11월에는 방을 빼야 하는, 그야말로 어디에 정착하기 쉽지 않은 날들이 계속되고 있다. 문득 내가 너무 욕심을 부리는 것은 아닌가 싶다가도, 아파트를 보러 다니면 아, 도무지 이런 집에서는 2년은 못살겠다, 싶은 걸 어쩌란 말인가. 어쨌거나 당분간은 안정을 찾을 수 있기도 하고, 다른 단원이 집을 구한 덕분에 나름 밥도 잘 해먹고 있는 상황. 그렇지만 그 와중에 무료함에 벌써 신물이 나고... 하나의 제목으로 묶기 어려워 소제목을 붙여보고자 한다.

    1. 집밥의 위대함.

    키르음식은 참... 여러모로 대단하다. 개인적으로 음식을 가리지 않는 편이고 대부분의 음식을 잘 먹는데다 한식에 대한 집착도 그다지 없는 편이라서 어딜 가더라도 음식에 큰 문제를 겪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했었는데, 도무지 키르기즈 (기본적으로 중앙아시아 음식이 이런 듯 싶지만) 음식은 몸에서 잘 받질 않는다. 기본적으로 밀가루와 설탕을 기본으로 한 탄수화물 덩어리에 식물성, 동물성을 가리지 않고 지방이 가득하고, 주된 조리 방식은 푹푹 끓이거나, 기름을 잔뜩 넣어 볶거나 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입에 그럭저럭 맞을지언정 먹으면 먹을수록 몸에서 거부하는 것이 느껴진다. 향신료는 다양한 편이지만 그 활용이 폭넓지 않고, 기본적인 식재료의 질이 좋지 않기 때문에 거기서 배어나온 맛이 좋지 않은 것은 당연지사. 기본적으로 닭고기는 생닭이 아닌 냉동닭들이고 (이게 참 이해가 안되는데, 분명 닭을 기르긴 할텐데 왜 닭고기는 전부 냉동일까? 모 현지인의 말에 따르면 대부분의 닭이 미국 수입닭이라는 듯. 그리고 닭의 질이 좋지 않아 껍질의 지방층이 두껍고 닭냄새가 아주 심하다.) 소고기도 우리나라 한우를 생각하면 완전 무리, 그리고 부위별로 나눠 파는 문화가 없는지 대부분 덩어리 고기로 판다. 충격은 일부 양고기로, 이게 정말 사람이 먹는 고기인가 싶을 정도로 냄새가 심하게 나는데 다들 맛있다고 잘들 먹으니... 그래서 비쉬켁에서 교육을 받는 동안에도 딱히 키르기즈 음식점에는 자주 가질 않았었다. 파견되고 나서는 집 찾는 동안 현지식만 먹어서 아주 괴로웠지만.

    그래서 집을 구하면 바로 밥을 해먹어야겠다고 벼르던 차, 결국 집을 구했고 밥을 해먹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대부분의 식사가 아주 성공적이었다! 사진은 영 이상하게 나왔지만 대부분 정말 맛있었다.

    그 대망의 집밥 첫끼. 된장찌개와 소시지 구이. 스틱 다시다 반, 스틱 고춧가루 반, 콩이 잘 살아있는 된장을 잘 풀고 양파와 대파, 감자를 넣고 푹푹 끓인 된장찌개는 정말 꿀맛이었다. 각인된 입맛이라는게 참 희안해서, 한국 음식을 먹을 때 뭔가 기뻐지는걸 보면 영락없는 한국인.

     오오, 이것은 부대찌개, 무려 신라면을 사리로 넣은 고급스런 부대찌개다. 햄이랑 소시지가 싼 관계로 잔뜩 넣고 푹푹 끓이니 정말 맛있었다. 역시 맛내기의 비결은 라면스프로, 끓이면 끓일수록 맛이 우러난다. MSG가 Mother's secret GARU의 약자라는 것은 정말 사실인듯.

    요즘 핫하다는 백종원 볶음밥. 이게 요물인것이, 간단하고 처음 먹었을 때 이게 뭐야 싶다가도 먹을수록 감칠맛에 빠져들게 만든다. 더군다나 여기 밥이 약간 된 밥이라서 볶아버리니 더욱 맛있어졌다. 자주 해먹을 듯.

    이게 바로 문제의 카레. 백종원 버전인데, 양파를 카라멜라이즈 하느라고 한시간이 걸렸다. 재료 준비하고 끓이고 어쩐 시간을 다 더하면 한 3시간은 걸린듯. 들통으로 하나 가득 만들어서 거의 3일을 먹었으니 많이 만들기도 했고... 근데 집에서 만든 카레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맛있었다. 양파 카라멜라이즈가 가져온 감칠맛이 진짜 상상을 초월하는 듯.

    이 외에도 감자전, 가지전, 감자 그라탕, 짜파게티 등 아침 한끼를 제외하고 전부 집밥으로 꽉꽉 채워 해먹고 있는 중. 덕분에, 어제 빌어먹을 키르기즈 국수로 해먹은 카레면때문에 옴팡 체했던 것을 제외하면 최근의 식생활은 상당히 만족스러운 중. 적어도 기름기 때문에 속이 부대끼거나 하진 않다는 점만으로도 참으로 행복하다. 새삼스레 이게 집밥의 위대함인가 싶다. 그리고 삼시세끼 챙겨먹는다는게 꽤나 어려운 일이라는 것도 깨닫는다.

    2. 무기력증

    위에서 밥을 열심히 해먹고는 있지만 하루하루의 생활 자체는 무기력, 자존감 훼손의 악순환이 꼬리의 꼬리를 물고 달려들고 있다. 밥 해먹는것도 하루 이틀 재밌지, 이 짓을 앞으로 9월까지 계속해서, 하루 종일, 아무런 일도 없이 이렇게 지내야 한다. 지난 OJT이후 상황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여전히 9월에 와라, 9월에 알아보고 많으면 많이하고 없으면 조금 해라, 이런 식. 애초에 나에게 관심이 별로 없다. 정규수업이 아니니 수업 시수 배분하는 회의에도 참석할 필요가 없고, 지금은 이미 방학을 해버려서 학교는 전부 폐쇄상태. 수요가 있기야 있겠다만은 기자재도 충분치 않고, 기관도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이라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으니 이거야 뭐... 심지어 OJT때의 내 코워커는 전화가 늘 불통이고, 교장은 전화를 해보면 기본적으로 늘 술을 마시고 있거나 어디엔가 놀러가 있는 상태.

    탈라스에 온 지 10일밖에 되지 않았지만 단조로운 생활 패턴에 벌써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온다. 기본적으로 유목민 문화라 관광지도 없고, 수도도 아닌지라 즐길거리도 없고, 인터넷 연결도 쉽지 않아서 wifi 라우터를 구입할 예정이나 이조차도 빠르지 않고, 그렇다고 아무데나 싸돌아 다닐만한 거리도 없다. 아침에 느즈막히 일어나서 단원의 집으로 가서 오전을 뭉개다가 점심을 해 먹고, 오후에는 잠깐 장보러 나갔다가 저녁을 해 먹고, 저녁에는 공설 운동장에 가서 걷기 운동을 한다. 어디 여행을 갈 수도 없고 그저 집안에서 하루 삼시세끼 밥만 꾸역꾸역 해 쳐먹으면서 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도대체가 남아도는 시간을 주체할 수가 없다. 당연히 지속적인 신세한탄 + 무기력증의 다단계에 빠져드는 중.

    참, 하루하루 보내는 내 시간이 아깝다. 공부를 하자니 집도 아직 불안정하고, 책도 없고, 무언가 닥치는대로 시작하자니 언어며 상황이며 그럴만한 상황이 잘 안된다. 애초에 바로 일을 시작할 수 있는 상황이어야 부딪히면서 배우고 적응도 빠를텐데, 그냥 집에 죽치고 있으면 그나마 알던 말들도 까먹을 판. 그렇다고 나가서 아무나 붙잡고 얘기하자니, 수도에서는 그렇지 않았지만 여기는 외국인이 워낙에 없는 동네라서 길을 돌아다니면 기본적으로 호기심 (약간의 비아냥도 섞인게 분명한) 가득한 시선들이 부담스럽다. 그야말로 백지상태. 백지를 잘 그려서 채워보라구요? 일 있다고 부른건 댁들이잖우...

    그나마 다음 주 부터는 동기 단원이 알아 온, 한국으로 일하러 가고 싶은 젊은애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모임 같은 것에서 한국어를 가르칠 수도 있을 것 같으니 조금은 할 일이 생기겠지만 삶의 만족도가 얼마나 개선될지... 그리고 요즘 예지력이 안 좋은 쪽으로 무척이나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는데, 9월이 되어도 딱히 긍정적인 상황이 될 것 같지는 않다. 아아, 암울한 미래여.

    3. 카라멜라이즈

    "아, 이 양파 계속 볶아야되냐?"

    25분 째 양파를 볶고 있던 친구놈의 인내치가 한계에 다다른 모양이다. 애초에 티비에 나온 레시피라면서 해먹자고 그렇게 난리를 피우던 건 벌써 까먹었는지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다. 눈물 콧물 쏟아가며 양파를 채썰어서 후라이팬 한 가득 양파를 갈색이 나도록 볶는다, 이것이 그 레시피의 첫 번째 단계였는데 벌써 난관에 봉착한 모양이다.

    "내놔 임마. 아주 참을성이라고는 개뿔만치도 없어. 가서 감자랑 당근이나 채썰어 그지새끼야."

    주걱을 뺏어들고 양파를 볶기 시작한다. 그래도 어느 새 양파는 숨이 죽고, 투명해졌다. 알싸하게 올라오던 생 양파의 냄새도 어느 새 끝이 둥글어지고, 달큰한 냄새가 올라온다. 그나저나 갈색이 되긴 되는걸까. 나무주걱으로 양파를 뒤적이고 있자니 점차 생각이 지워지고 무념무상의 경지에 다다를 듯 하다. 양파가 나를 볶는건지, 내가 양파를 볶는 건지.

    나는 의외로 단순 작업을 좋아한다. 예를 들어 콩을 빈 페트병에 넣는 일이라든지, 빨래를 개는 일이라든지, 아니면 마늘이나 더덕의 껍질을 벗기는 일 같은. 단순 작업은 정말로 사람을 단순하게 만드는 힘이 있어서 복잡하던 마음도 어느 새 차차 가라앉고, 계속 하다 보면 미묘한 희열도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는 와중에 양파에서 점차 갈색이 돌기 시작했다.

    "야야, 그냥 이쯤에서 해 먹자. 벌써 40분째야. 나머지는 다 썰었으니까 이제 카레 풀까?"

    어느 새 옆으로 다가온 친구가 지분거리며 말한다. 문득 짜증이 치솟는다.

    "아 새끼, 여지껏 해 놓은게 아깝지도 않냐. 가서 닥치고 기다려. 지가 해먹자고 해놓고는 왜 참지를 못해?"

    면박을 주고 궁둥짝을 세게 걷어차서 쫓아내고 다시 양파 볶기에 집중한다. 점차 갈색의 비중이 커지고, 이젠 묘한 달콤한 냄새와 구수한 냄새가 올라오기 시작한다. 카라멜 색이 나도록 야채를 볶는다는 의미에서 카라멜라이즈인 모양인데, 그 과정에서 양파의 단맛이 극대화되고 감칠맛이 난다나 뭐라나. 냄새를 맡아보니 그럴싸하다. 문득 여러모로 들들 볶이는 내 청춘도 계속 볶으면 이 양파처럼 카라멜라이즈 될런지 궁금해진다. 눈물 콧물 나게 하는 쏘는 매운맛은 가라앉고, 은근한 단맛과 구수한 맛이 생기게 될까.

    "야, 이제 완전 갈색이야. 봐봐. 니 똥만큼 갈색이네."

    "이 미친놈이 카레하는데 똥 얘기를 하고 자빠졌어. 뒤질래? 일단 이거나 먹어봐. 달달하냐?"

    "오 이게 양파야? 맛있는데?"

    카라멜라이즈한 양파를 넣고, 채썬 햄과 당근과 감자를 한데 볶는 데 또 10여분, 그리고 거기에 물을 붓고 충분히 육수를 우려내는데 또 10여분. 고작 특식으로 카레 한번 해먹자고 시작한 일이 어느 새 오후와 저녁 시간의 대부분을 잠식하고 있는 상황에서 드디어 카레가루를 풀기 시작했다. 이 카레가 다시 걸쭉해지는데 또 10여분.

    "야, 밥 퍼."

    따끈한 흰 쌀 밥 위에 카레를 한 국자 가득 얹는다. 우선 흔한 카레가루로 끓인 집 카레같은 냄새보다 좀 더 고급스런 냄새가 난다는 점에서 합격점을 주고 싶다. 한 숟가락 크게 떠서 한 입.

    "..."

    "..."

    맛있다. 확실히 볶은 양파에서 나오는 감칠맛과 단맛이 카레가루의 뒷받침을 아주 든든하게 하고 있어 맛의 빈틈이 없다. 거기에 폭 익은 감자와 당근의 맛, 그리고 중간중간 단백질의 정체성을 확연히 드러내고 있는 햄까지, 당장 가져다 팔아도 될 만큼 맛있다. 허기진 우리는 얘기도 나눌 새 없이 허겁지겁 그릇을 비우고 결국 한 그릇을 더 먹은 뒤에야 숟가락을 멈췄다.

    "맛있네."

    "그러게, 진짜 맛있네. 양파 볶은 보람이 있어."

    친구는 골똘히 생각에 잠긴 표정을 하더니 말했다.

    "근데 그냥 카레 가루로 대충 양파 썰어넣고 끓여도 맛있지 않냐? 울 엄마는 양파를 애초에 안넣고도 맛있게 끓이던데."

    "양파를 볶아서 넣어봐도 결국 카레는 카레니까. 다음번에 또 해 먹기는 귀찮다."

    아아, 결국 오늘의 교훈. 이래도 맛있고 저래도 맛있는 음식이라면 굳이 노력을 더 들일 필요는 없겠다. 내 청춘을 들들 볶아서 카라멜라이즈를 해본들, 결국 다른 카레에 들어가면 볶은 양파가 들어갔는지 아님 그냥 카레인지 알게 뭐냐는 생각이 든다. 그나저나 저 들통에 가득한 카레는 언제 다 먹는담...

     

    + 마지막은 알겠지만 그냥 어중간한 픽션.

    ++ 여기서 2년을 어떻게 지내지. 군대에서도 내 시간은 아까웠지만, 그래도 할 일이 늘 있었어서 무기력하진 않았다. 어찌보면 군대보다 더욱 질이 안좋은 상황에 빠져 있고, 이게 내 잘못이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화가 난다.

    +++ 집밥은 간단하고 맛있는게 최고다. 그런 면에서 양파 카라멜라이즈 카레는 당분간 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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