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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121, 피로.
    코이카 2015. 8. 15. 0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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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오늘은 이동제한이 풀리고 수도로 놀러 가는 날. 지금 자도 일어나야 하는 시간까지는 4시간밖에 잘 수 없지만 그래도 짧게 쓸 건 쓰고 자야겠다. 뭐 오늘도 밝은 얘기는 아니고, 그저 어느 정도 걱정했던 것이 그저 '확인된' 날이랄까. 졸리니까 길게 쓰진 말고 짧게 쓰고 자자.

    한국에서 일하다 오신 아주머니가 운영하는 슈퍼마켓에 단골로 다니고 있다. 물건도 나쁘지 않고, 우리가 주로 사 먹는 물의 브랜드가 여기에 있기 때문에 (참 무서운게 똑같이 돈 주고 사먹는 물인데 어떤 브랜드의 물은 가끔 물이끼가 둥둥 떠있는 경우가 있다. 가장 메이저한 회사의 물만 마실 수 밖에 없는데, 그 물을 여기서 판다.) 그리고 아주머니가 꽤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자주 가게 된 것. 오늘도 물과 과자를 사러 들렀더니 아주머니가 조금 심각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 사무실이랑 계약이 잘 된거냐.

    사실 현지어로 얘기를 했기 때문에 100%는 아니겠으나 여하튼 대충 저런 얘기였다.

    - 그렇다. 9월부터 시작한다.

    - 그런데 5번 학교에서 한국어 수업 필요 없다는데 알아봤냐.

    - 음... 누가 그러더냐.

    - 5번 학교 교장이 그러는걸 전해 들었다. 진짜는 아닐 수도 있다.

    여기까지 들었을 때 든 감정은 사실은 피로였다. 어차피 처음부터 이 학교에서 내가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잉여인력이라는 것은 예상했던 바, 몰랐던 것도 아니고 화도 나질 않았다. 물론 진짜 얘기는 교장한테 직접 들어야겠지만 처음 OJT를 갔을때부터 내가 컴퓨터 선생이 아니냐는 둥, 정식 수업은 줄 수 없다는 둥, 컴퓨터 수업을 한국어로 가르치라는 둥 그다지 반가운 손님은 아니었으니 아예 틀린 얘기는 아닐거라는 예상이 들었다. 게다가 이 아주머니가 나한테 굳이 이런 얘기를 해서 무슨 이득을 얻겠는가? 더하여 (현지어로 대화를 나눠 역시 정확하지는 않지만)

    - 그 학교 예전에 미국 봉사단원 받았다가 역시 필요없다고 해서 다른 학교로 보낸 적이 있다.

    - 알았다. 내일 비쉬켁 가니 사무실 사람들과 얘기해 보겠다.

    집에 와서 교장에게 전화를 몇 통이나 걸어보았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지금까지 연락두절이었던 코워커에게 전화를 걸어보니 웬일로 신호가 갔고 통화를 해 보니 이미 반은 꽐라가 된 목소리였다. 아마도 교장도 불금이니만큼 (늘 취해있지만) 어디선가 거나하게 한잔 걸치고 있을 가능성이 높겠지. 본격적인 확인은 내일 수도에 올라가서나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문제는, 지속적으로 누적되는 피로다. 키르기즈에 온 이후로 한 번이라도 어떤 일이 개운하게 풀렸던 적이 있었던가. 그렇다. 지금 나는 난생 처음 와 보는 나라에서 살고 있고, 의사소통도 명확하게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이므로 상황이 개운하게 풀리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 무리일 지 모른다. 그렇다면 적어도 내가 여기에 온 목적에 맞게 일을 해 나가면서, 그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면서 어떤 보람을 느낀 적이 있었던가. 이미 이 곳에 온 지 4개월, 짧다면 짧지만 벌써 2년의 코이카 기간 중 1/6이 지나갔다. 다른 나라의 다른 동기단원들은 이미 자신의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상황. 그 와중에 나는 일을 시작조차 해보지 못한 채 방바닥만 긁고 있다가 그 와중에 여기저기서 (내가 스스로에게 날린 빅엿들을 포함하여) 많이도 얻어맞았다. 처음에는 화도 나고, 우울하고, 침울하기도 했었지만 지금은 그저 피로감이 몰려온다. 오늘의 이 해프닝도 그저 피곤했다. 아, 그렇게 될 일이 그렇게 됐다- 라는 기분?

    그러다 빨래를 개고, 청소를 마치고, 샤워를 하는 도중 문득 내가 느끼는 불만족과 피로의 근원이 명확해졌다. 이 피로의 근원은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곳에 존재함'에서 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의 생활이 불만족스러웠고, 나 스스로가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벗어났지만 적어도 한국에서의 생활은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일 사이에 있었다. 학교를 그만둘 때 많은 동료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내가 학교에 남아주길 바랐었다. 그 외에 가족들, 여자친구, 친구들 역시 내가 남아주길 바라는 사람들이 많았다. (물론 그 정도가 얼마나 될 지 의심스럽긴 하지만 여기서 그 근원까지 의심하기 시작하면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으니 그만두겠다.)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그 필요를 떨쳐내고 더 크게 쓰일 수 있는 자리를 찾아 왔건만,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나는 내 필요를 의심받는 상황에 놓여버린 것이다. 이게 내 우울과 피로의 근원이구나. 새삼 깨닫는다.

    이전의 내가 이루고 있던 사회망이 어땠는지를,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더듬어 짐작하는 일은 참으로 궁상맞다. 이미 나는 그 사회망을 찢어내고 멀리 와 있고,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다고는 하나 그 곳으로 다시 돌아가기에도 무언가 처량하다. 그리고  그저 내가 좀 더 필요한 곳에서, 더 좋은 일을 하기 위해 나름의 큰 결심을 하고 왔건만 어찌 상황은 악화일로를 걷는가. 다행스럽게도 피로를 느끼게 된 이후에 슬픔이나 화가 격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이게 진짜 다행인지는 잘은 모르겠지만.

    어쩐지 이 노래가 듣고 싶다. 아니, 이 가사가 와닿는걸지도.

    What is lost can't be replaced. / What is gone is not forgotten.

    잃어버린 것은 대체될 수 없어. / 떠나버린 것은 잊혀지지 않지.

    (어딜 찾아봐도 What is lost can be replaced로 나오는데, 내용상으로도 can't이 맞는 것 같아서 난 내맘대로 can't로 쓰련다. 발음도 정확하진 않아도 can't에 가까운 것 같고.)



    + 어쨌거나 수도로 가는 2박 3일, 실컷 놀고 잘 먹고 오자.

    ++ 기대가 너무 컸던게 아닐까 싶다가도, 애초에 일에 대한 기대조차 하지 않을 것이었다면 여길 오지도 않았겠지 싶다.

    +++ 이런 상황에서 감사일기는 참 가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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