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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108, 108 번뇌.
    코이카 2015. 8. 3. 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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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가 빨리 진다. 저녁과 새벽에는 꽤나 쌀쌀한 기운이 감돈다. 늘 속옷만 입고, 아무 것도 덮지 않고 잠들었는데 어제는 쌀쌀함이 예사롭지 않아서 바지를 입고 얇은 담요를 끌어 덮었다. 슬슬 가을이 감돈다. 여전히 낮에는 햇볕이 굉장한 기세를 뽐내지만 어느덧 그 기세도 예전같지 않다. 긴 봄과, 그만큼 긴 여름이었다. 계절을 거슬러 이곳으로 와 오랜 봄을 살았고, 실제 시간보다 무척이나 길게 느껴지는 여름을 살고 있다. 그 여름도 고작 2주 남짓이었다. 하루하루가 축 늘어진 길가의 개들처럼 더디고 무기력하게 흘러가는데, 막상 돌아보면 그 개들은 어느 새 사라지고 없다. 어느 새 108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축 늘어진 개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남는 시간이 많으면 뒤를 돌아다보게 된다. 난 이미 그러한 시간을 경험해 본 적이 있다. 여주의 산 꼭대기, 아무도 찾지 않는 새벽 1~4시, 그저 시간을 한겹씩 얇게 세던 시간에 나는 오롯이 혼자가 되었다. 오만 잡상이 흘러가는 가운데 어느 순간이 되면 그저 텅 빈 머릿속으로 과거를 복기하곤 했다. 아니, 과거를 복기하기에 지나치게 긴 시간이었다. 지나간 일, 사람의 결을 따라 나를 되짚는 일은 고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 일을 그만둘 수 없었던 것은 과거의 나를, 물론 온전히 객관적이라고 할 수는 없는 시각이지만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다면적으로 살펴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다고 답이 나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 시점의 지나간 일과, 지나간 사람과, 지나간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제대한 이후로 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본의 아니게 다시 그러한 시간이 찾아왔다. 그것도 내 삶에서 여행으로조차 가보리라 생각하지 않았던 키르기즈스탄에서 본인의 과거를 본의 아니게 되새김질 하게 되었다. 우연찮게도 비슷한 시점에서 보게된 과거의 흔적들이 나의 지난한 복기를 부채질했다. 지난 6년간의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꽤나 급격한 격류를 타고 있었다. 아마도 군대에서 복기하던, 그 이전 기억들이 여전히 기반을 형성하고 있어서 나는 여전히 그 기억에 속박되어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미 그 기억들은 풍화되어 나라는 인간의 기반을 형성하고 있을 뿐 그 위로 제멋대로 쌓이는 경험들이 들쭉날쭉 나를 만들어 온 것이었다. 이제서야 돌아본 6년간의 나는 그저 뒤죽박죽, 거칠고 딱딱한 덩어리가 되어가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최근의 나는 울적하다. 무엇을 잃어버리며 여기까지 온 걸까. 지금 여기에 있는 이런 사람이 내가 꿈꾸던 내 미래상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그저 그 경험들이 쌓여 굳어져가는 관성대로, 그것이 '나다움'이라 믿으며, 아니 오히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지금까지 달려왔던 것이다. 그렇게 옛날 일에 묶여 살던 인간이 어째서 최근의 나는 바라보지 못했던걸까. 바쁘다고, 그것보다 더 급한 일들이 있다고, 말초적인 즐거움을 쉽게 즐길 수 있게 되었기에, 아니면 돌아보기가 괴롭고 두려워서, 어쨌거나 이러저러한 이유를 대며 잊었거나 무시했던 것들이 이만큼이나 쌓여있었던 것이다.

    가장 편하게 사는 방법은,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그저 눈 돌린채 눈 앞의 일들을 생각하며 지금까지의 관성으로 나아가는 것이었을테다. 그렇게 살았다해도 어차피 정도라는걸 지키며 살아왔으니 큰 무리 없이, 그저 잘 살았을거라 생각한다. 다만 그런 생활이 지속되면, 이전의 내가 그토록 되기 싫어하던 꼰대 중 하나가 될 가능성이 높아졌을 것을 잘 알고있다. 게다가 이미 뒤를 돌아본 이상, 그리고 지금처럼 잉여로운 생활이 계속되는 이상 이를 무시하고 살아갈 수는 없다. 이미 만들어진 과거의 사건을 지금에 와서 없던 일로 만들거나 과거의 선택을 바꿔 후회스러운 일들을 없애거나 하는 방법은 없다. 그저 6년 전의 일을 다시 조금씩 되풀이할 수 밖에 없게 되어버렸다. 지나간 일을 보고, 또 보고, 다시 생각하고, 복기해서 그저 조금씩 내 날카롭고 거친 부분을 다듬어 앞으로 내가 되고 싶은 인간의 형태를 향해 관성을 바꾸는 수 밖에는 없다.

    아, 이것을 다행이라 해야 하는가. 지금의 각박하고, 지나치게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척하며 가시를 세우던 나를 발견하게 된 이 넘치는 시간에 대해 감사를 표해야 하는가. 예상치 못한 깨달음, 그리고 그 깨달음이 달콤한 것이 아닌 쓰디쓴 것일 때 당황하게 된다. 그리고 그 쓴 맛에 문득 알아챈 현실을 마주칠때면 그저 막막하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다. 일이 두 가지로 늘어났을 뿐, 앞으로 다가오는 일들을 처리하고, 뒤를 돌아보고 나를 다듬어 나가는 일을 꾸준히 해 나갈 수밖에 없다. 어느 한 쪽으로 치우쳐 매달리기에는 내 삶이 너무 아까우니, 지금까지의 계획대로 9월이 오면 닥치는 일들을 맞이하고 그 후의 일들은 차차 해나가면 될 일이다.

    번뇌에 빠진 하루가 또 지났다. 108일에 시작한 글이 109일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어쨌거나 그 번뇌가 나를 좀 더 나은 인간으로 만들어 주기만을 바랄뿐이다.

    + 어디선가 비슷한 생각을 노래했던 가사가 있었던 것 같아서 한참 고민하다 그것이 장기하와 얼굴들의 '그때 그 노래'와 비슷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다음 곡 '마냥 걷는다'와 함께 듣는 것을 권한다.

    장기하와 얼굴들 - 그때 그 노래

    너무 빨리 잊어버렸다 했더니
    그럼 그렇지 이상하다 했더니
    벌써 몇 달째 구석자리만을 지키고 있던 음반을
    괜히 한 번 들어보고 싶더라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심했지
    이게 그 때 그 노래라도 그렇지
    달랑 한 곡 들었을 뿐인데도 그 많고 많았던 밤들이
    한꺼번에 생각나다니

    예쁜 물감으로 서너 번 덧칠했을 뿐인데
    어느새 다 덮여버렸구나 하며 웃었는데
    알고 보니 나는 오래된 예배당 천장을
    죄다 메꿔야 하는 페인트장이였구나
    그렇다고 내가 눈물 한 방울 글썽이는 것도 아니지마는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심했지
    이게 그 때 그 노래라도 그렇지
    달랑 한 곡 들었을 뿐인데도 그 많고 많았던 밤들이
    한꺼번에 생각나다니

    장기하와 얼굴들 - 마냥 걷는다

    눈송이마저 숨을 죽여 내리고
    내 발소리 메아리 되어 돌아오네
    바람만이 이따금씩 말을 건네고
    난롯불에 녹였던 손끝이
    벌써 다시 얼었고

    언제부터 시작했는지는 몰라도
    어디까지 가는 건지는 몰라도
    쉬어갈 곳은 좀처럼 보이지를 않아도
    예전에 보았던 웃음들이
    기억에서 하나 둘 사라져도

    마냥 걷는다 마냥 걷는다
    좋았던 그 시절의 사진 한 장 품에 안고
    마냥 걷는다 마냥 걷는다
    좋았던 그 사람의 편지 한 장 손에 쥐고
    마냥 걷는다 마냥 걷는다
    얼어붙은 달밤을 혼자 걸어간다

    이래서 노래를 듣는구나 한다. 한편으론 이런 감각을 멋지게 풀어내는 그 감각이 부럽고, 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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