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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188. 대체 불가능에 대한 갈망.
    코이카 2015. 10. 22. 0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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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수업은 한국 아이돌 그룹의 그룹명과 이름을 가지고 '누가 ~입니까?', '그 사람은 ~입니까?'에 대한 대화를 만들어보는 내용이었다. 진도가 가장 빠른 반이기도 했고, 막상 아이돌의 사진과 이름만 보여주고 뮤직비디오를 안보여주고 넘어가기는 또 뭐한지라 예전에 한국 문화 수업을 하면서 가지고 있었던 뮤직비디오를 틀어주었다. 개인적으로 아이돌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번에 문화수업을 준비하면서 뮤직비디오를 많이 보다 보니 어느 정도 편견은 사라진 상태. 어디서 저렇게 외모도 출중하고, 노래도 잘 하고, 춤도 잘 추는 사람들을 모아서 '훈련'에 가까운 연습을 거쳐 아이돌로 만들어 낸 것일까에 대한 순수한 경탄까지도 느끼는 와중이었다. 몇번이고 봤던 뮤직비디오지만 다시 봐도 여전히 대단한 대한민국 아이돌들. 그렇다고 내가 각각 이름을 외우거나, 노래를 다운받거나 하는 정도는 아니지만서도 내심 보고있으면 눈이 정화된달까. 보여주는 덕분에 나도 좀 쉬기도 했고.

    그러던 중 2NE1의 '너 아님 안돼'를 틀어주었다. 날 아는 사람들은 대충은 알겠지만, 2NE1은 전혀 내 취향이 아니다. 오히려 아이돌에 대한 편견이 사라진 지금에도 도대체가 뭐가 좋다는걸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니까. 나는 2NE1의 데뷔를 비교적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군대에서 선임들이 얘들 데뷔한답시고 오만 오두방정이란 오두방정은 다떨었기 때문이다. 군인이다보니 그들의 음악성보다는 단연 독보적으로 예쁜 '산다라박', 그리고 미묘하지만 어쨌거나 섹시한 편인 '박봄'에 포커스가 맞춰진 것은 당연지사. 그러나 나는, 군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관심이 없었는데, 그들이 하는 음악이 지나치게 '센 언니'스타일을 고수했기 때문이었다. 2NE1은 계속해서 꾸준히 그 스타일을 유지해왔고, 그렇기에 나도 꾸준히 관심 밖의 아이돌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아이돌에 대한 편견이 사라졌기 때문인지, 아니면 지나치게 뽕끼넘치는 키르음악만 자주 들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오늘 앉아서 노래를 듣고 있으려니 2NE1의 노래가 괜찮게 들렸다. 물론, 여전히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음악은 아니지만, 잘 만들어진 음악임에는 분명하다고 생각했으니까. CL이나 공민지의 랩은 착착 감기고, 박봄과 산다라의 목소리는 호소력이 있고, 그래서 학교에서 나오는 길에 친구에게 2NE1은 한국 가요계에서 대체불가능한 존재로군, 하고 카톡을 보냈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 대체 불가능함이 결국 키워드구나, 하고.

    아마도 내가 그렇게 갈망하던 것도 바로 이 '대체 불가능함'이었으리라 생각한다. 3년간 일한 학교를 떠나게 된 계기 중의 하나도 '아마 이 자리에 누가 들어오더라도 상관 없을 것이다'라는 생각에서 오는 허무함이었다. 현재 내가 서 있는 자리를 누군가 대체한다고 했을 때, 그 자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잘 돌아가리라 생각하는 것은 발밑이 뻥 뚫리는 듯한 감각에 가깝다. 그래서 무언가 대체 불가능한 자리, 내가 내 일을 하는 것이 오롯해서 내 가치를 있는 그대로 인정받을 수 있는 자리를 찾아서 이 곳까지 왔고, 이 곳에서의 현실은 뭐... 알다시피. 여하간에 이제서야 내 심리를, 그것도 그다지 관심도 없었던 2NE1을 통해서 깨닫게 된 것이다. YG엔터테인먼트에 감사 편지라도 보내야 하나 싶은 심정이랄까.

    그러면서 동시에, 아, 참 꿈같은 생각을 했구나, 자조했다. 물론,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 있어서, 특히나 가족이나 연인, 친구처럼 가까운 사이일수록 어떤 한 개인은 대체 불가능에 가까운 지위를 가진다. 이를 빼고 사회적 관계로 눈을 돌릴 때, 대체 불가능함은 사실상 불가능해진다고 봐야한다. 어차피 사회란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것이니까. 어떤 체계 속에서 각 개인이 모두 '대체 불가능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시스템을 상상해보자. 와, 진짜 아름답고 유토피아로구나! 싶겠지만 이는 재앙에 가깝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고 늘 불확실한 가능성에 놓여있는데 만일 그 대체 불가능한 누군가가 사라진다면 그 시스템은 어떻게 유지가 될 것인가? 더군다나 학교같은 관료제 시스템에서 대체 불가능함을 갈구했다니. 어리석도다, 우민이여. 참으로 어리석도다.

    한편으로는 그 틈바구니에서 어떻게든 나의 대체 불가능했음을 찾으려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 계속해서 마음을 뒤집는다. 나는 대체 불가능한 국어 선생님이었을거야, 나는 대체 불가능한 담임이었을거야, 나는 대체 불가능한 한국어 선생님이었을꺼야, 적어도 누군가에게는 나는 대체 불가능한 무엇이 되어 있을거라는 생각을 단단히 쥐려고 하면 할수록 마음이 짠해진다. 아아,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이렇게까지 스스로가 증명해내야 하는가. 자존감이 낮아진 탓인지 생각할수록 바닥을 긁는 기분이다.

    이제 남은 것은 어찌 보면 단순하다. 인간이, 내가 대체 가능한 존재임을 수용하고 살 것인지, 아니면 미지의 장소 X에 대체 불가능한 나의 가치를 써먹을 수 있는 곳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끊임없이 그 자리를 찾을 것인지. 아니면 제 3의 길을 찾아야 하나. 둔해진 머리로 생각하기는 지나치게 어려운 문제라서 기록해두고 되새김질을 해 볼 생각이다.


    + 반기 보고서를 보신 소장님께서 메일을 보내셨는데 참으로 입맛이 쓰다. 결국은 누구의 잘못도 아닌, 각자가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의 선택을 했을 뿐인데 어째서 상처를 받는 사람은 발생하는가. 그 상처는 누구의 책임이고, 무엇으로 치료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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