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이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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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108, 108 번뇌.코이카 2015. 8. 3. 03:22
해가 빨리 진다. 저녁과 새벽에는 꽤나 쌀쌀한 기운이 감돈다. 늘 속옷만 입고, 아무 것도 덮지 않고 잠들었는데 어제는 쌀쌀함이 예사롭지 않아서 바지를 입고 얇은 담요를 끌어 덮었다. 슬슬 가을이 감돈다. 여전히 낮에는 햇볕이 굉장한 기세를 뽐내지만 어느덧 그 기세도 예전같지 않다. 긴 봄과, 그만큼 긴 여름이었다. 계절을 거슬러 이곳으로 와 오랜 봄을 살았고, 실제 시간보다 무척이나 길게 느껴지는 여름을 살고 있다. 그 여름도 고작 2주 남짓이었다. 하루하루가 축 늘어진 길가의 개들처럼 더디고 무기력하게 흘러가는데, 막상 돌아보면 그 개들은 어느 새 사라지고 없다. 어느 새 108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축 늘어진 개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남는 시간이 많으면 뒤를 돌아다보게 된다. 난 이미 그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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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100, 그의 근황 2.코이카 2015. 7. 26. 02:32
1. 그가 키르기즈스탄에서 생활한지도 어느 새 100일이 되었다. 탈라스로 파견되어 생활한지도 1달 반이 되어간다. 그는 이 시간의 흐름이 사실 전혀 달갑지 않다. 특히나 지난번 마지막으로 블로그에 글을 올린 뒤 지금까지의 생활을 돌이켜 생각해보니 더욱 그러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의 어제는 오늘과 비슷하고, 내일은 오늘과 비슷할 것이었기에 그는 최근 생각하기를 멈췄다. 그저 흐르면 흐르는 대로, 닥치면 닥치는 대로, 하루 하루 끼니를 해결하는 삶에서는 생각은 괴로울 뿐이었다. 생각을 멈춘 대신 생각을 대신할 무언가 - 책조차 구하기 쉽지 않은 그에게 아이러니하게도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은 게임이었으므로 게임을 - 를 손대기 시작했으며, 그 여파로 조금씩 낮과 밤이 뒤바뀌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문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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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84. '배운 것'과 '알게 된 것'.코이카 2015. 7. 10. 03:43
아아, 지난 글을 쓰고 최소한 3일 안에 이 글을 쓰고자 했는데 역시나 의지박약으로 일주일만에 글을 쓰게 된다. 무료한 삶은 사람을 게으르게 만든다. 조만간 (이렇게 써 놓고 아마도 꽤나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서야 쓰겠지만) 쓸 생각이지만 지금의 내 생활은 그야말로 군대보다 재미 없는 삶을 살고 있다. 물론 이런 삶도 나쁘지 않으며, 누군가는 소박한 일상의 소중함을 느낄 것이고, 심지어 삼시세끼 등의 예능에서는 하루 세 끼 밥 먹고 사는 일을 예능으로까지 만들고는 한다. 그렇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별다른 감흥이 없는 소리다. 작은 동네, 별다른 유적도 없고, 정신적인 세계를 체험할 일도 없고, 음식의 다양성도, 딱히 할 일도 없는 그런 일상. 그저 하루 세 끼, 아침은 요구르트를 마시니 남은 두 끼를 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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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77, 길 위의 사람.코이카 2015. 7. 3. 03:20
쓰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은데 되려 그 때문에 뭘 써야 할지를 모르겠는데다가 무기력과 귀차니즘에 푹 절어들어간 상태인지라 막상 요 며칠간은 아무것도 쓰지 못하는 상태였다. 이대로 지나가단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생각이 사그라들 것 같아서 일단 순차적으로 쓰고 싶었던 것들을 쓰려 한다. 오늘은 류시화 시인의 2013년 페북 글부터. 문학의 길을 걷겠다고 집과 결별하고 노숙자가 되자 사람들은 제정신이 아니라고 했다. 학교를 마치고 교사가 되었으나 한 달도 안 돼 그만두었을 때 사람들은 미친 것 아니냐고 했다. 불교 잡지사를 다니다가 반 년도 못 채우고 퇴사했을 때 그들은 '왜?'라고 물었다. 클래식 음악 카페를 열었다가 석 달 만에 문을 닫았을 때 사람들은 그새 망한 것이냐며 의아해했다. 거리에서 솜사탕 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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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71, 집을 구하다.코이카 2015. 6. 27. 03:05
드디어 보금자리를 찾았다. 그리고 입주했고, 침대도 들여왔기 때문에 어느 정도 사람 사는 꼴은 갖춘 상태. 일단 오늘은 사는 꼴 부터 보고. 일단은 침실. 일찌감치 카페트는 걷어치웠다. 다음 사진에서 볼 수 있듯, 키르기즈의 집은 오만 구석에 아주 카페트를 도배를 해 놓는데 (심지어 벽에도!) 개인적으로는 카페트 자체를 싫어하는데다 온갖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사는 키르의 바닥이 결코 깨끗할 일 없기에 침실로 쓸 방을 정한 뒤에 바로 카페트를 둘둘 말아 옆방에다 치워버렸다. 참고로 지금 계약한 집은 방이 총 4칸 (거실 용도로 사용되는 곳 포함), 주방, 화장실, 욕실, 발코니로 이루어진, 꽤나 큰 아파트인데 그 중에서 나는 방 2개 (실질적으로는 침실 1개만) 사용하는 중. 처음에는 침대를 쓸 생각이 없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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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66, 집밥의 위대함, 무기력증, 카라멜라이즈코이카 2015. 6. 22. 03:26
자존감이 무기력증에 빠진 날들이다. 다행이 집은 구했고, 내일 이사를 하지만 그마저도 11월에는 방을 빼야 하는, 그야말로 어디에 정착하기 쉽지 않은 날들이 계속되고 있다. 문득 내가 너무 욕심을 부리는 것은 아닌가 싶다가도, 아파트를 보러 다니면 아, 도무지 이런 집에서는 2년은 못살겠다, 싶은 걸 어쩌란 말인가. 어쨌거나 당분간은 안정을 찾을 수 있기도 하고, 다른 단원이 집을 구한 덕분에 나름 밥도 잘 해먹고 있는 상황. 그렇지만 그 와중에 무료함에 벌써 신물이 나고... 하나의 제목으로 묶기 어려워 소제목을 붙여보고자 한다. 1. 집밥의 위대함. 키르음식은 참... 여러모로 대단하다. 개인적으로 음식을 가리지 않는 편이고 대부분의 음식을 잘 먹는데다 한식에 대한 집착도 그다지 없는 편이라서 어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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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59, 무지개 같은 희망코이카 2015. 6. 15. 02:27
하루 종일 비가 많이 오고, 당연하게도 아파트는 적당한 매물이 나타나지 않아서 그저 우울함으로 바닥을 때리던 날이었다. 특별한 성과 없이 호텔에서 죽치다 마지막으로 들러본 가게에서도 뾰족한 해답을 얻지 못한 채, 급작스럽게 쏟아붓는 비를 피해 저녁을 먹으러 식당으로 들어갔다. 밥을 먹고나니 거짓말처럼 비는 그쳐있었고, 꽤나 쌀쌀한 공기 속에서 바닥의 오물과 물웅덩이를 피해 바닥만 보며 걷고 있었는데 옆에 걷고 있던 동기 왈, '무지개다!' 정말 무지개였다. 사진에는 잘 나와있지 않지만 꽤나 커다란 쌍무지개였고, 구름에 가려진 부분은 보이지 않았지만 바닥에 두 다리를 디디고 있는 완전한 형태의 무지개였다. 한국에서는 저렇게 큰 무지개를 본 적이 있었던가 생각해보니 애초에 무지개를 본 일이 꽤나 드물었지 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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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58, 그의 근황.코이카 2015. 6. 14. 03:26
0. 유독 블로그를 쓰려는 오늘 호텔의 와이파이가 느리다. 그래도 그는 꾸역꾸역 블로그 글쓰기 페이지로 기어들어와서 기여코 글을 쓰기 시작했다. 벽에는 방금 때려잡은 모기의 납작한 잔해가 붙어있고, 토요일 밤, 창 밖은 이제사 조용해졌다. 개가 유난스럽게도 짖는 밤이다. 그는 문득 스스로가 처량해진다. 평생 가보리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살게 될 줄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나라의, 그 중에서도 작은 도시의, 그 중에서도 작은 호텔의 방 안에서 어울리지도 않는 최신 노트북을 두드리며 글을 쓰는 것이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슬프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1. 덩치 큰 사내가 호텔 화장실 세면대에서 속옷을 열심히 빨고 있다. 변기 뚜껑 위에는 이미 세탁한 양말과 속옷 상의가 꽈배기처럼 말려있고, 그는 지금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