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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58, 그의 근황.
    코이카 2015. 6. 14. 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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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유독 블로그를 쓰려는 오늘 호텔의 와이파이가 느리다. 그래도 그는 꾸역꾸역 블로그 글쓰기 페이지로 기어들어와서 기여코 글을 쓰기 시작했다. 벽에는 방금 때려잡은 모기의 납작한 잔해가 붙어있고, 토요일 밤, 창 밖은 이제사 조용해졌다. 개가 유난스럽게도 짖는 밤이다. 그는 문득 스스로가 처량해진다. 평생 가보리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살게 될 줄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나라의, 그 중에서도 작은 도시의, 그 중에서도 작은 호텔의 방 안에서 어울리지도 않는 최신 노트북을 두드리며 글을 쓰는 것이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슬프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1.

    덩치 큰 사내가 호텔 화장실 세면대에서 속옷을 열심히 빨고 있다. 변기 뚜껑 위에는 이미 세탁한 양말과 속옷 상의가 꽈배기처럼 말려있고, 그는 지금 마지막 팬티를 열심히 세탁하는 중이다. 그는 문득 손으로 속옷을 빠는 건 제대 이후, 아니 훈련소 수료 이후 처음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물론 군대에 있던 동안에도 걸레는 손으로 열심히 빨았지만 속옷은 훈련소 이후에는 늘 세탁기로 빨았기 때문이었다. 불안정한 전압 때문인지 백열등의 밝기가 밝아졌다 어두워졌다를 반복하고, 고요한 작은 호텔 방 안에는 그가 온 힘을 다해 세탁하는 소리만 요란하다. 세탁 하는 손끝이 아직 야무져 무언가 피식 웃고 싶은 가운데 화장실 쪽창을 통해 저 멀리서 은은하게 코란 읽는 소리가 배경음악으로 깔리면 우습고 처량한 광경을 넘어서 무언가 기괴한 세기말적 광경을 떠올리게 하겠군, 하고 그는 생각한다.

    단순노동의 한 가운데서도 그의 머리를 떠나지 않는 것은 그가 이 나라에 도착한 뒤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되물었던 질문이었다. 문득 그는 얼마 전 다시 봤던 영화 고지전의 한 장면을 생각한다. 극 초반, 주인공을 생포한 북한군 장교가 이야기한다. 너희들이 왜 지는줄 아나? 그건 너희들이 싸우는 이유를 모르기 때문이다. 극 후반, 주인공은 죽어가는 북한군 장교를 만나 묻는다. 싸우는 이유가 뭐냐? 북한군 장교는 대답한다. 알았는데, 너무 오래되서 까먹었다. 그는 이 대사가 스스로의 상황을 설명하는데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여기에 온 이유가 뭔지 알았는데, 지금은 까먹었다고. 그는 쓰게 웃는다. 적어도, 이렇게 살려고 온 건 아니었는데, 하고 생각한다.

    2.

    그는 조금 뻔뻔해졌다. 아니, 애초에 뻔뻔한 성격이었는데 그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을뿐인지 모른다. 모르는 나라, 모르는 동네, 모르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에 그는 그의 동기 2명과 함께 떨어졌다. 그리고 앞으로 2년간 살아야 할 집을 찾아야한다. 우리나라처럼 부동산이 있다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겠지만, 이 나라는 수도조차도 부동산 제도가 잘 운영되고 있지 않은 나라이며, 주도라지만 고작 인구가 3만밖에 되지 않는 이 도시에서는 부동산같은건 애초에 존재하질 않는다. 통역? 없다. 도와줄 사람? 분명 몇 명의 현지인이 도와주고는 있지만 시원찮다. 현지어? 간단한 생활 회화정도는 가능하지만 집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집을 구하는 방법? 모른다. 그래서 그냥 무작정, 아파트를 돌면서 아무 곳에나 물어보기로 한다. 그래서 아무 가게나 들어가서 그는 그냥 묻는다. 빈 아파트 있어요?

    그리고 그는 놀란다. 생각보다 발벗고 나서 도와주는 사람들이 많았다. 처음 들어간 가게에서 만난 아주머니는 가게 문을 닫고 거의 2시간 가까이를 그와 함께 집을 보러 돌아다녔다. 산책길에 만난 청년은 퇴근 도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근처에 운동장과 키르기즈어 학원 등을 소개시켜주며 1시간 가까이를 함께 걸었다. 전화기를 들고 헤메고 있으면 누군가가 받아서 10여분 거리의 길을 함께 걸어가준다. 애초에 사람들을 쉽게 믿으려 하지 않는 그는 큰 혼란에 빠졌다. 살면서 성선설을 믿던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성악설을 신봉하게 되었고, 지금은 성절망설을 창시할 정도로 네거티브한 방향으로 빠지고 있었는데 이런 사람들이 있다니, 그의 세계관이 크게 흔들렸다. 역시 이럴 때 믿을 수 있는건 사람뿐인가? 라고 그는 생각했다.

    물론, 결과까지 좋은 아름다운 사태는 쉽사리 일어나지 않았다. 몇 군데의 집을 돌아본 후, 그는 이게 집인지, 아니면 구 소련시대의 유물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좋은 집도 왕왕 보이긴 하였으나, 이는 임대하는 집이 아니거나, 아니면 임대 기간이 애매한 경우 뿐, 대부분의 경우는 그의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더하여 온 도시에 '어리숙한 한국인 세 놈이 집을 구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져 심지어 길가던 주정뱅이조차도 아파트는 구했냐, 뭐 가르치냐 등등의 개인정보를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는 문득 속이 더부룩함을 느꼈다. 이미 온 도시의 3분의 1은 그와 그의 동료들의 상태, 하는 일, 구하고자 하는 바를 알고 있을터였다. 집값이 올라감은 물론이고, 안전도 위협받고, 사회가 무너지고 국가가 무너... 그는 생각을 그만두기로 한다.

    3.

    그는 막막하다. 어려움을 예상치 않은 바는 아니었지만 이런 어려움은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이런 어려움을 왜 겪어야 하는지를 의심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렇게 엉망진창, 구멍이 숭숭 뚫린채로 운영되는 상황이 정상적인 상황인걸까, 그는 생각해본다. 그리고 문득 외로워진다. 그의 동료의 표현에 따르자면 버림받은 기분과 흡사한 듯 하다. 그 역시도 그 표현에 동의했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아무 연고도 없는, 이역만리 타향의, 그 와중에 시골에 버림받은 것이었다. 문득 그는 사무소의 모 요원이 얘기한 사람은 어쨌거나 다들 살아, 라는 표현을 떠올렸다. 그래, 어떻게든 살겠지, 그렇지만 어떻게든 살고 싶어서 온게 아니야, 그는 생각한다. 그리고 야이... 그는 생각을 그만두기로 한다.

    다시 0.

    그는 이 곳에 와서 물을 상당히 많이 마시게 되었고, 그 결과로 화장실을 자주 가게 되었다. 자정이 넘은 시각, 그의 소변에서는 양의 누린내가 진동했다. 늙은 양의 고기에서는 흡사 고무와도 비슷한 누린내가 강렬하게 솟구치는데, 오늘 저녁으로 먹은 양고기의 냄새가 몸에 배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문득 그는 생각한다. 뜨거운 햇빛에 피부는 타고, 몸에서는 양 누린내가 나고, 피부는 엉망이 되고, 영어도 한국어도 까먹고, 그나마 현지어조차 잘 못하게 되면 대체... 그는 생각을 그만두기로 한다. 아, 그는 한 가지 생각만은 그만둘 수 없었는데, 그것은 바로 앞으로 양고기가 정말 맛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키르기즈에서 삶은 양고기를 먹여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그 역시 한국에서 양고기를 꽤나 좋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 단체의 실태를 언론에라도 찔러버리지 않으면 원통해서 눈을 못 감겠... 그는 생각을 그만두고 잠을 청하기로 한다.

    그는 내일 또 다른 아파트를 보러 가기로 했다. 이 도시의 모든 사람이 그와 그의 동료들의 존재를 아는 게 먼저일지, 아니면 그 전에 아파트를 구할 수 있을지가 관건인, 바보같은 탐색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개뿔. 괜히 재밌게 쓰려다가 시간만 들었다. 졸리다.

    ++ 위의 글은 (아주 약간의) 픽션이다.

    +++ 진짜 늙은 양고기는 더는 못먹겠다. 여전히 더부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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