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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77, 길 위의 사람.
    코이카 2015. 7. 3. 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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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쓰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은데 되려 그 때문에 뭘 써야 할지를 모르겠는데다가 무기력과 귀차니즘에 푹 절어들어간 상태인지라 막상 요 며칠간은 아무것도 쓰지 못하는 상태였다. 이대로 지나가단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생각이 사그라들 것 같아서 일단 순차적으로 쓰고 싶었던 것들을 쓰려 한다. 오늘은 류시화 시인의 2013년 페북 글부터.

     

     

    문학의 길을 걷겠다고 집과 결별하고 노숙자가 되자 사람들은 제정신이 아니라고 했다. 학교를 마치고 교사가 되었으나 한 달도 안 돼 그만두었을 때 사람들은 미친 것 아니냐고 했다. 불교 잡지사를 다니다가 반 년도 못 채우고 퇴사했을 때 그들은 '왜?'라고 물었다. 클래식 음악 카페를 열었다가 석 달 만에 문을 닫았을 때 사람들은 그새 망한 것이냐며 의아해했다. 거리에서 솜사탕 장사를 시작하자 그들은 '정말?'하고 눈을 의심하다가 한 계절만에 접자 뒤에서 웃었다.

    가을에 출판사에 취직했으나 봄에 퇴사하자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서울에서의 생존을 못 견디고 산 중턱의 버려진 집으로 들어갔을 때 그들은 나에 대해 포기했다. 산에서의 생존도 한계에 부딪쳐 여의도의 회사에 다니자 사람들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렸다. 어느 날 바바 하리 다스의 <성자가 된 청소부> 원서를 읽고 그 책을 번역하겠다고 회사에 사표를 내자 어리석은 결정이라고 만류했다.

    불법체류자가 되기로 마음먹고 뉴욕으로 떠나자 '꼭 그래야만 하는가?'하고 사람들은 질문했다. 두 달 만에 가진 돈을 전부 털어 인도의 명상센터로 가자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다고 했다.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서귀포로 이사하자 사람들은 계절마다 놀러 오면서도 외롭겠다고 했다. 외로운 것은 그들이었다. 두 해 만에 서울로 오자 그 좋은 곳을 왜 떠났느냐고 아쉬워했다.

    인도에만 자꾸 가자 사람들은 유럽에도 가고 러시아에도 가라고 조언했다. 잠언 시집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의 원고를 완성하자 세 군데 출판사에서 '시 읽는 독자가 적다'며 출간을 거절했다. 인도를 열 번 여행하고 <하늘호수로 떠난 여행>을 썼을 때 '인도 기행문을 읽을 독자는 거의 없다'며 출판사들은 고개를 저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인생수업>을 번역하자 '죽음을 앞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며 또다시 거절당했다.

    방황한다고 해서 길을 잃는 것은 아니다. '모든 여행에는 자신도 모르는 비밀스럼 목적지가 있다'고 마르틴 부버는 말했다. 그 많은 우회로와 막다른 길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그 길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길을 가는 사람'이다. 공간의 이동만이 아니라 현재에서 미래로의 이동, 탄생에서 죽음까지의 과정도 길이다. 인간을 '호모 비아토르'라고 하는데 '떠도는 사람', '길 위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삶의 의미를 찾아 떠나는 여행자,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방황하며 스스로 가치 있는 삶을 찾는 존재를 가리킨다. 호모 비아토르는 길 위에 있을 때 아름답다. 꿈을 포기하고 한곳에 안주하는 사람은 비루하다. 집을 떠나 자신과 대면하는 시간을 가진 사람만이 성장해서 집으로 돌아온다.

    우리는 항상 선택 앞에 놓인다. 한 가지 길의 선택은 가지 않은 많은 길의 포기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자신이 걷고 있는 길이 좋은 길이라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약초를 연구하기 위해 찾아온 UCLA 인류학과 학생 카를로스 카스타네다에게 멕시코의 야키족 인디언 돈 후앙은 말한다.

    "그 어떤 길도 수많은 길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너는 자신이 걷고 있는 길이 하나의 길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그 길을 걷다가 그것을 따를 수 없다고 느끼면 어떤 상황이든 그 길에 머물지 말아야 한다. 마음이 그렇게 하라고 한다면 그 길을 버리는 것은 너 자신에게나 다른 이에게나 전혀 무례한 일이 아니다. 너 자신에게 이 한 가지를 물어보라. '이 길에 마음이 담겨 있는가?' 마음이 담겨 있다면 그 길은 좋은 길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 길은 무의미한 길이다. 마음이 담긴 길을 걷는다면 그 길은 즐거운 여행길이 되어 너는 그 길과 하나가 될 것이다. 마음이 담겨 있지 않은 길을 걷는다면 그 길은 너로 하여금 삶을 저주하게 만들 것이다. 한 길은 너를 강하게 만들고, 다른 한 길은 너를 약하게 만든다."

    마음이 담긴 길을 걷는 사람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과 나란히 걷는다. 행복의 뒤를 좇는다는 것은 아직 마음이 담긴 길을 걷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담겨 있다면 자신이 걷는 길에 확신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자신에게는 유일한 길이며, 다른 길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 2013년 10월 2일, 류시화 시인의 페이스북에서

     

     

    이 글을 읽은 아침은 기분이 유독 좋지 않았다. 한국어를 하겠다는 학생들의 첫 수업이 있었던 날인데, 수업을 하기로 한 장소가 시내에서 택시로 30분을 꼬박 가야 있는 시골의 학교였기 때문에 아침 일찍 일어나서 준비를 해야 했다. 준비를 다 마치고, 며칠간 준비한 PPT를 재생할 노트북과 교재를 들고 부랴부랴 집을 나서 택시탈 곳을 수소문하였는데 당연히 한번에 찾기는 힘들고 그나마 학생놈에게 전화해서 물어보려 하니 전화를 받질 않는 것이었다. 간신히 통화를 하니 콜택시를 불러준다기에 기다렸는데, 꼬박 20분을 기다리고 나서야 전화로 '오늘 아무도 없어. 수업 못해. 오지마. 수요일에 시작하자." 라는 것이었다. 다시 터덜터덜 집으로 걸어들어와 분노의 청소를 하고 잠시 쉬는 동안 읽게 된 글이 바로 이 글이었다.

    어떤 부분이 와닿았는지 정확히 꼬집을 수는 없었지만 뒤통수를 얻어 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코이카를 지원하면서부터 지금까지 겪은 일들과 그 일들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었던 내 마음 어딘가를 쓰다듬는 동시에 송곳으로 찌르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길의 비유가 정말로 그랬는데, 그동안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인생과 선택의 의미를 명확하게 표현해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도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고, 선택은 하나의 문을 여는 것과 동시에 다른 문들을 닫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어린 아이에게는 문으로 둘러쌓인 거대한 광장이 존재한다면, 점차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어떤 문을 열어서 다음 장소로 이동하고 나면 이전보다는 적은 수의 문만이 존재하는 광장이 나타나고,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점차 선택할 수 있는 문이 줄어들어 결국 어느 시점이 오면 눈 앞에는 단 하나의 문만이 계속되는, 이미 더 이상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없는 복도가 나타난다고 생각해왔다. 코이카를 선택하게 된, 29살의 이현진은 그런 불안에 시달렸던 것 같다. 어느 순간부터 문을 여는 기대감보다 문을 닫고 지나온 것들에 대한 후회가 점차 커져갔었다. 게다가 이미 돌아갈 수도 없고, 많아봐야 손에 꼽을 만큼의 선택지만이 남은 길에 들어섰으며, 조금 더 시간이 흘러 몇 개의 문을 더 열어버리면 이젠 더 이상 선택지조차 남아있지 않은 그런 복도에 들어설 것이고, 그때는 너무 늦게 될 것이라는 불안에 시달렸다. 그래서 부랴부랴 크고 쉽게 열 수 있었던 문이 아닌, 억지로 구기고 들어가야 하는 문을 찾아 열었고 그 길이 코이카였다.

    당연하게도 그런 선택을 하면서 포기해야 했던 것들은 정말 컸다. 당장 내가 대역죄라도 저지르지 않는 이상 매달 꼬박꼬박 손아귀에 쥐어지던 달콤한 월급을 버렸고, 그 월급이 쌓여가면서 안정되어갈 몇 년 이내의 미래를 버렸으며, 그 기간 동안 누릴 수 있었던 많은 권리와 자기발전의 기회를 버렸고, 한국에서의 소중한 인연들도 어느 정도는 버렸다. 그보다 더 크게 포기한 것은 중학교 때부터 꿈꿔 온 교사에 대한 꿈을 포기한 것이다. 난 교사로서의 생활에 만족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나름대로 충실한 생활을 하며 열심히 살았다고 스스로 평가할 수 있다. 이렇게 무거운, 버리고 온 것들의 무게 때문에 비장하고 마음이 불안했었다. 난 늘 좀 더 '좋은 사람', '많은 것을 경험한 사람'이 되고 싶었고, 버리고 온 것들의 무게보다 더 많은 것들을 짊어지고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으로 코이카에 왔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판단하기에 키르기즈스탄에 파견된 뒤 지금까지의 내 상황은 내 기대와는 많은 것들이 달랐다. 그런데다 은연중에 '그렇게 많은 것들을 버리고 왔는데 여기서 뭔가 제대로 얻고 느껴서 돌아가야만 해!'라는 부담감이 지속되고 있었고, 그 때문인지 이 길 말고 다른 길로 간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기에 더욱 부담감에 짓눌리는 생활을 해 왔었다. 그 와중에 이 글을 읽었다.

    '방황하는 것이 길을 잃는 것이 아니며, 그 어떤 길도 수많은 길 중 하나에 불과하고, 자신이 걷고 있는 길이 하나의 길에 불과하다는 것, 어느 순간 그것을 따를 수 없다고 느끼면 어떤 상황이든 그 길에 머물지 않을 수 있으며, 마음이 그렇게 하라고 한다면 그 길을 버리는 것은 자신에게나 다른 이에게나 전혀 무례한 일이 아니라는 것.'

    따끔한 위안이자 따스한 질책같았다. 생각을 뒤집으면 그렇게 어렵지는 않은 문제였다. 실제로는 여러 장벽이 있지만, 어차피 철밥통을 걷어 차고 나온 마당에 고작 다시 한국으로 들어가는 일 쯤이야 별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내가 다른 문을 열었던 것은 좀 더 방황하기 위함이었고, 코이카는 그 방황의 한 방편이었을 뿐이니 이 길을 훌쩍 떠나 다른 방황의 길로 들어선다고 해도, 혹여 내가 다시 예전의 길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 역시도 또 다른 길로 이어지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게도 그 길을 버리는 것이 자신에게나 다른 이에게나 전혀 무례한 일이 아니라는 부분에서 특히나 가슴이 울렁거렸다. 어쩐지 용서받는 기분이었다. 죄책감은 남아있으되, 그것이 내 잘못은 아니라는 선고를 받은 기분이랄까.

    물론, 나는 류시화 시인처럼 저렇게 여기저기를 들이받고 다닐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 학교를 그만두고 코이카로 들어온 결정도 다시는 못 할 결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나는 기본적으로 무언가 안정된 생활을 바탕으로 많은 것들을 누리면서 살고 싶다. 경제적 윤택보다는 문화적으로 윤택한 사람이 되고 싶다. 불법체류자가 되고 싶지도, 인도에 가고 싶지도, 노숙자가 되고 싶지도 않다. 그렇지만 이런 내 인생도 류시화 시인과는 다르지만 나에게는 그보다 훨씬 중요한 선택들이 있고 그 길들을 걸어왔다. 그리고 아마도, 지금까지 걸어왔던 내 인생은 마음이 담긴 길이었다. 그저 내가 걸어본 적 없는 길에 좀더 내 마음을 담을 수 있지 않을까 궁금해서 떠나 본 다른 길이었고, 비록 아직까지는 이 길에 마음을 담기는 어렵다고 느끼고 있지만 적어도 방황하며 가치있는 삶을 찾아 떠나는 것까지는 성공했다. 그 방황의 끝에서, '아, 옛날에 걸었던 길이 정말로 내가 마음을 담았던 길이었네'라고 생각이 든다면 방황하던 힘으로 다시 그 길로 돌아갈 수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래서 이제사 확실하게 결정을 내린다. 당장 이 길을 버리고 다른 길을 찾기에는 아직 무엇도 시작해보지 않았고, 내 스스로도 책임감이 없다고 자책하게 될 것이 뻔하다. 우선은 9월, 무언가 일을 시작하고 나서 결정해도 그 기간은 괴롭겠지만 크게 늦지는 않을 것이다. 9월에도 비슷한 생각이 든다면 기관 변경을 신청하자, 그런 이후에도 비슷하게 상황이 변하지 않는다면 조기귀국을 하자. 방황할 수 있는 길은 여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그리고 적어도 그렇게 돌아가고 나면 코이카에 대한 미련은 더 이상 남지 않을 테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시간이 흘러 나 역시도 '많은 우회로와 막다른 길을 거쳐서만 존재할 수 있는 나'라는 평가를 내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시작에 겪는 지금의 번뇌는 혹독한 예방접종이라고 생각한다면, 뭐, 못 견딜 일도 아니다.

    + 이 글을 읽었던 날 밤, 그러니까 벌써 3일 전 저녁 자이카 전문관으로 온 오사토씨를 우연찮게 만나서 맥주를 마시며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오늘 탈라스에 사시는 한국분을 우연찮게 만나 밥을 얻어먹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공통적으로 든 생각은 이 세상에 정해진 인생 코스는 없다, 는 것이다.

    ++ 그 와중에도 자세히 밝히기 힘든 병신같은 일은 여러모로 다각도에서 일어났다. 적어도 여권 관리는 좀 철저하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제정신은 아닌 건 확실해 보인다.

    +++ 언젠가 좀 더 자세히 밝혀 적기 위해 남긴다. 자아성찰 : 지나친 현실주의, 안정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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